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언어를 요구한다. 호주제폐지/논술
법무부가 호주제를 폐지하고 개인별 신분등록제 도입을 내용으로 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호주를 정점으로 하는 가족질서가 해체되고 가족구성원이 평등하게 존중받는 새로운 가족질서가 등장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크게 높아짐은 물론 우리 사회는 양성평등 시대를 앞당겨 맞이하게 될 것이다.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양성평등이 실천되고 있는 요즘, 남녀인권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 올린 이 법안이 시대의 변화상을 잘 담아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새 술을 담기 위해서는 부대를 새로 짜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 법안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고비가 많다. 우선, 유림 등 호주제 폐지 결사 반대를 외치고 있는 사회 보수층의 반발을 거세다.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측은 이 법안이 시행될 경우 엄청난 사회혼란이 초래될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이처럼 사회 보수층을 설득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현재로서는 이 법안이 국회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지조차 의문이다. 보수적 성향의 남성국회의원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회에서 이 법안이 무사히 통과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재혼 가정의 아들, 딸들이 새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못해 받는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든가 불합리한 호주승계제 때문에 생기는 상속, 승계 문제로 가족들이 서로 반목한다든가 하는 것이 현재 지적되고 있는 호주제의 대표적인 단점들이다. 어쩌면 법안 반대측이 주장하는 대로 불합리한 조항만을 집어내 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호주제를 폐지하는 것에는 그 단점으로 지적받는 세세한 조항을 고치는 것을 뛰어 넘는 시대적 의의가 있다.
그 의의는 호주제가 남녀차별을 정당화해온 기제로서 기능해온 상징적 제도라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사회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호주제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는 호주제가 남녀평등시대에 걸맞지 않은 과오와 불합리를 생산해 온 상징물이라는 사실에 있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사용하기에 편리하고 그것을 없애는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해서 그것을 없애야 하는 시대적, 역사적 당위가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컨대 호주제를 폐지하는 작업은 남녀불평등의 시대를 끝내고 양성평등 시대로 가기 위해 구시대의 상징제도를 청산하는 역사적 작업으로서 긍정돼야 한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언어를 요구한다. 20세기 초 서양에서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가 여성의 참정권 허용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요구했듯이 21세기 초반을 지내고 있는 우리 시대는 호주제 폐지라는 새로운 언어를 요구하고 있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외국인 고용허가제가 인종인권문제와 노동문제에 있어 우리에게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준 것처럼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이번 법안 역시 국회를 통과해 남녀 인권과 평등의 가치에 있어서 우리 사회가 한층 도약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번 법안이 성공적으로 국회를 통과하기를 바란다. 原 1474자
2003년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