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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수상2(隨想二)

2만 달러/작문

by K기자 2013. 3. 25.

2만 달러/작문


전직 중국집 주방장 출신인 윤씨는 오늘도 할 일이 없다. 중국집을 그만둔 지도 이제 네 달째. 가지고 있는 돈은 떨어진 지 오래고 빚만 계속 늘어간다. 윤씨는 중국집에서 일할 때 챙겨 둔 중국산 독주를 들고 건물 옥상을 찾는다. 수타면이 인기를 끌 때는 여기저기에서 스카우트 경쟁을 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 받은 그였지만 면뽑는 기계가 들어서고 더구나 값싼 조선족 요리사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중국집을 나와야 했다. 바닥에 신문을 깔고 술병을 빨던 그에게 굵은 활자체의 헤드라인이 눈에 밟힌다. “정부, 2만 달러 시대 진입, 국정지표로 삼아”. 평소 같았으면 달러가 얼마인지 계산하기 귀찮아 내팽겨치고 말았을 터지만 이번엔 다르다. ‘얼마전 1만 달러를 넘었다고 법석을 떨더니 벌써 2만 달러인가’. 윤씨는 요즘 환율이 얼마쯤 되는지 가늠하며 기사를 읽는다.


요즘의 달러 시세를 달러당 1천 2백원으로 잡으면 1만 달러는 1천 2백만원이다. 윤씨처럼 마누라와 두 자식이 있는 4인 가족 기준으로 환산하면 1년에 4천 8백만원 즉, 한 달에 적어도 4백만원은 벌어야 보통 한국인 축에 낄 수 있다는 소리다. 한 달 벌이로 그만한 돈을 쥐어 본 적이 있었던가 윤씨는 생각해 보지만 아무래도 기사가 거짓말 같기만 하다. 주방장 시절 가장 많이 쥐어본 게 2백만원이다. 마누라가 파출부를 해서 번 돈이 6십만원이니 도합 2백 6십만원. 지금은 비록 실업자, 노숙자 신세지만 윤씨는 스스로를 한번도 하층민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그렇게 못 살았나’. 스스로 중산층이라 생각해왔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누구엔지 모를 배신감이 들어 얼굴이 갑자기 시뻘개졌다.


안주도 없이 독주를 한 모금 더 하고 나서 읽은 그 아랫기사를 읽은 윤씨 마음은 더욱더 심란하기만 하다. 다른 선진국의 예를 비춰볼 때 빠르면 5년, 늦어도 10년 안에는 1인당 소득 2만 달러 시대에 들어선다는 것이 정부의 목표란다. 그러니까 지금 평균의 한국인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의 두 배, 한 달 수익 8백만원, 연간 총소득 1억 시대가 곧 있으면 온다는 말이다. 연소득 1억. 어느 부잣집 얘기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일반 가정이 그만큼 벌어들이는 것이란다. ‘보통대로만 살면 나도 1억을 벌 수 있다는 말인가’. 독주가 내뿜는 술기운 때문인지, 1억이라는 말이 가져다 주는 환상 때문인지 윤씨는 자꾸 어지럽기만 하다.


사실 이런 식의 기사는 윤씨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윤씨가 어릴 때부터 국민 소득 1천달러 달성이니, 수출 1백만 달러 달성이니 하는 슬로건은 항상 있어왔다. 정부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잘 살게 된다고 해서 열심히 일했건만 그 대가가 이것이다. ‘죄라면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데’ 라고 뇌까리던 윤씨는 아까 느꼈던 배신감의 정체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도대체 1만 달러, 2만 달러는 누구를 위한 구호란 말인가. 가지고 온 독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넣은 윤씨는 이제 비틀거리며 옥상 가장자리로 가 섰다. 충혈된 눈으로 옥상 아래를 바라보던 윤씨가 눈물을 훔친다. 옥상 아래로 마누라와 자식 새끼들이 아른거린다. 돌풍에 2만 달러 신문지를 휘감아 올리자 스르르 눈을 감는 윤씨, 옥상 아래로 몸을 던진다. 

原 1567자 


(55분) 2003년 7월 2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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