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다/도서

자기만족적 자선 VS 타자지향적 자선

by K기자 2015. 6. 21.



연말정산이 되고 기부금 영수증 어디 있나를 찾아다니다 남재일 교수가 쓴 이 글에 생각이 미쳤다. 남교수의 글 가운데  "우리는 가장 명백한 자선의 대상이 눈앞에 있는 것보다 멀리 가상으로만 있는 쪽을 더 편안해하는 것은 아닌가? 기부를 통해 '적선의 대상'이 나를 쳐다보는 것보다 '다수의 사람'이 '적선하는 나'를 바라봐주기를 더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은 두고두고 새기고 싶은 문장이었다. 


"지제크식 이웃 사랑"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님 말씀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 역시 예수님 말씀이다. 말은 쉬운데 행동은 참 어렵다. 혹자는 원수까지는 몰라도 이웃은 이미 사랑하고 있다 할지 모르겠다. 일손이 부족하면 가서 도와주고 명절이면 음식을 나눠먹고 상을 당하면 함께 울어준다고...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이웃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누가 한번 선을 그어보라. 그 경계 안에 몇 명이나 있는가? 나머지 사람들은 사랑하지 말자는 얘기인가? 박애주의자인 예수님이 그런 명령을 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보편적인 윤리적 명령이 되려면 이웃의 특정한 경계를 가정해서는 안 된다. 각기 다른 이웃 사랑이 충돌해 원수로 만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면 어쩌라고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윤리를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의 견해를 참조해보자. 지제크는 관건을 '이웃 사랑'이라고 단언한다. 그에게 이웃은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사는 존재가 아니라 각자의 삶이 가장 가깝고 절실하게 관계 맺는 사람들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그런 관계는 자본을 둘러싸고 투쟁하고 타협하고 협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맺어진다. 즉 이해관계로 얽힌 경쟁하는 존재들의 관계가 바로 이웃인 것이다. 주차 공간을 다투는 상가 주민, 승진을 겨루는 입사 동기, 임금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는 노사가 모두 이웃이다. 가장 직설적인 삶의 현실이 존재하는 곳에서 관계 맺고 있기 때문에 싫든 좋든 가까이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웃인 것이다. 그래서 이웃은 원수가 되기 쉽고, 바로 그 때문에 이웃 사랑이 윤리의 핵심이라는 얘기다. 결국 '이웃 사랑'은 가장 적나라한 삶의 진실이 드러나는 생산의 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식의 '이웃 사랑'은 쉽지 않다. 대개는 거꾸로 간다. 대기업 회장이 노동자를 폭행한 최철원 사건을 떠올려보자. 그는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에 대한 불만을 담은 내용으로 1인 시위를 하는 노동자를 맷값을 주고 야구방망이로 구타했다. 그런 그가 모교인 대학에는 15억 원의 장학금을 기부했다. 진짜 이웃은 '원수'로, 남은 '이웃'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 사례는 극단적이지만 유사한 행태는 흔하다. 임금을 대폭 삭감해 얻은 이윤으로 교회의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한 경우를 가정해보자. 임금 삭감의 이득은 다수의 이웃에게 고통을 주지만 가치중립적인 '경제적 행위'로 치부되면서 윤리적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 반면 이렇게 남은 이득의 일부를 기부하면 선행으로 칭송받으며 단번에 윤리적 영예를 가질 수 있다. 계산에 밝은 인간이라면 어찌 이 방법이 가진 효율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지제크는 이런 행태, 다수의 이웃을 괴롭혀 남에게 조금 집어 주고 윤리적 행위의 영예는 자신이 갖는 것을 '물신주의적 부인'으로 규정하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희생과 헌신의 제스처만을 윤리적 행동인 것처럼 떠받들면서 이웃의 진정한 고통은 없는 듯 부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친절하게 각주까지 붙인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진정한 이웃은 원수의 모습을 하기 쉬우니 남을 끌어들여 이웃을 외면하는 잔머리를 경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희생과 헌신의 제스처를 받아주는 맞춤한 존재만 이웃으로 경계 짓지 말고 상처받은 타자의 얼굴을 마주보라는 요구가 아니었을까?


   해마다 연말이면 어김없이 불우이웃돕기 구호가 등장한다. 소녀가장이나 독거노인 같은 존재들이 그 대상이다. 자선의 효과가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맞춤형 자선'의 대상이다. 표를 찾아다니는 정치인들은 이들과 함께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자신을 연출하는 정치인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은 대개의 사람들이 행하는 이웃 사랑을 비슷한 방식으로 상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감전사고 등으로) 사지를 잃은 장애자가 길바닥에 엎드려 들이미는 동냥냄비보다 구세군의 자선냄비에 적선하길 더 좋아한다. 그 이유는 다를 수 있다. 혹자는 눈앞에서 구걸하는 장애자의 뒤에 '앵벌이 조직'이 있다고 의심할 수 있다. 또 다른 이는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구세군이 가장 잘 판단해주리라 믿을 수 있다. 단지 '직거래'보다 '중개상을 거치는 것'이 안전하고 효율적인 기부 행위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이런 이유는 기부를 단지 물질적 증여로만 생각하고, 공여자와 수여자가 마음을 나누고 관계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여기서 자문해봐야 한다. 우리는 가장 명백한 자선의 대상이 눈앞에 있는 것보다 멀리 가상으로만 있는 쪽을 더 편안해하는 것은 아닌가? 기부를 통해 '적선의 대상'이 나를 쳐다보는 것보다 '다수의 사람'이 '적선하는 나'를 바라봐주기를 더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선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 듯 싶다. 자기만족적 자선은 자선의 대상에 별 관심이 없다. 대상을 고르더라도 상대가 얼마나 도움이 필요한가보다 도움이 얼마나 가시적 효과를 나타내는지가 기준이 되기 쉽다. 그래서 치유가 어려운 불치병 환자보다는 공부 잘하는 소녀가장이 더 적합한 자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자선을 통한 사태의 변화를 직접 느낌으로써 보다 더 분명하게 자선의 즐거움을 향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자기만족적 사선은 상대의 불우함이 무능이나 운명적 불운 때문이라고 전제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약자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약자'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타고나거나 스스로 처지를 자초한 실존적 약자'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선 행위는 상대에 대해 어떤 부채도 없는, 유능하거나 운이 좋은 자의 순수한 도덕적 결단의 산물이다. 이 경우 자선은 언제나 '시혜적 자선'의 성격을 띨 뿐, 물질의 증여를 통해 이웃과 관계 맺고자 시도하지 않는다. 물질은 주어도 마음을 직접 내주지는 않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이웃 사랑'은 이웃을 돕는 이벤트로 불우한 이웃의 존재를 가리고, 나아가 이웃을 불우하게 만드는 불평등한 사회적 조건마저 가린다.



    타자 지향적 자선은 자기만족적 자선의 이 모든 경향과 반대다. 모든 약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이므로 사회구성원은 어느 정도 자선의 의무를 갖는 것을 전제한다. 이 때문에 불우한 처지에 있는 타자와 관계 맺기를 거부하지 않고, 가시적인 자선의 효과에 집착하지 않으며, 자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타자 지향적 자선은 불우해지기 전에 이웃을 돕는 것, 이웃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을 가장 바람직한 자선의 형태로 간주한다. 그것이 자선의 대상이 가장 많은 것을 얻으면서, 자선의 주체가 생색내지 않는 최초의 이웃 사랑이기 때문이다. 지제크가 말하는 이웃 사랑의 방식도 결국은 대상의 권리를 빼앗아 일부를 돌려주면서 생색내지 말고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처음부터 인정하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2010


 - 남재일 '사람의 거짓말 말의 거짓말' 中 74-7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