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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싸우는 기자들 (워싱턴포스트의 워터게이트 보도 연구) [출처]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 (워싱턴포스트의 워터게이트 보도 연구)|작성자 panicanic

by K기자 2015. 6. 21.



밥 우드워드 기자와 칼 번스틴 기자


미국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
 

 

 

워터게이트 사건을 영화화한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워터게이트 사건이 

마무리된지 1년도 안된 시점에서 만들어졌다.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 

 

 

1.지은이: 알리샤 C. 셰퍼드 옮긴이: 차미례

2.출판사: 프레시안북

3.초판 1쇄 발행: 2009년 3월 27일

 

(11p.)

"우드워드와 번스틴이 유행시켰던 어휘들이 지금은 언론계의 일부 전문용어가 되어 있다. 믿을 만한 소식통, 사건 탐사보도, 딮 백그라운드(취재원이 준 정보를 직접 인용하지 않고 기사의 참고자료로만 사용하는 경우를 이름), 오프 더 레코드, 스톤월(협조나 논의, 혹은 결단을 거부하며 버팀), 컨펌(기사 내용이 맞다고 확인해줌). 딥 스로트 같은 표현들은 모두 기자와 정부 관료 사이에 주고받는 말들 사이에서 쏟아진 것들이다.

 

(22p.)

"기자가 언론계에 들어가는 것은 돈 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보수까지 넉넉히 받는 것을 축복이라고 느끼긴 하지만, 가장 근본적 이유는 그저 '꼭 알고 싶어서' 그런 것 뿐이다."

 

(55p.)

"그런데 갑작스럽게 엄격한 직업윤리가 생겼지요. (워싱턴 포스트에) 갑자기 기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런저런 기준들이 생기면서 방금 털린 자전거 가게에 대해 그냥 책상에 앉아서 전화나 거는 걸로는 부족하고, 직접 엉덩이를 들고 여섯 구역 거리를 걸어가서 취재를 하게 되었어요."

 

(92p.)

"그렇지만 당시에는 모두 백악관 당국이 써달라는 대로 기사를 썼다. 그러나 우드워드와 번스틴은 백악관 출입기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백악관을 화나게 해서 취재 통로를 잃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없었다. 그들은 다만 기삿거리를 쫓아갈 뿐이었다.

 

 평생을 CBS 기자로 보냈으며 1969년에 국방부 출입기자로 워싱턴에 왔던 밥 시퍼는 이렇게 말했다. '우드워드와 번스틴은 그때 다른 기자들은 전혀 하지 않은 짓들을 했다. 즉 퇴근 후에 사람들 집까지 찾아가 문을 두드리는 일이었다.'"

 

(95p.)

"우드워드와 번스틴은 힘에 넘치고 야심 있으며 그 기사를 끝까지 추적할 수 있는 외부인의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뒤엔 계속해서 기사를 취재하라고 밀어붙이는 큰 신문사의 힘이 있었던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그들에게 기자의 최고의 선물인 시간과 융통성을 선사했다. 발행인인 캐서린 그레이엄 회장과 최고 편집 책임자들은 그들을 격려해서 집요하게 단서를 물고 늘어지게 했고, 한밤중에 비밀리에 소식통들과 접선케 했으며, 낮이면 전화로 관리들을 쫓아다니게 했다. '오직 기사만을 위해' 뛰게 만들었던 것이다."

 

(104p.)

"기자들은 표면 아래 숨어 있는 것을 긁어내는 기사보다 정치적으로 배급되는 부드러운 기사들을 더 좋아했다. 워싱턴에 있는 2000명 가량의 기자 중에서 내키지 않은 기분으로라도 실제로 워터게이트 기사를 다뤄본 적이 있는 기자는 열네 명밖에 되지 않았다."

 

(110p.)

"나는 볼드윈이 꼭 자기 얘기를 공표해야만 한다고 그의 변호사들을 계속 따라다니며 졸라댔지요. 그래야만 다른 기자들이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떨어져나간다. 돈을 받고 기사를 판다면 그 내용에 대한 신뢰성이 떨어진다며 설득했어요."

 

(119p.)

"나중에 사이먼스는 그 기사가 왠지 처음부터 줄곧 불안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 데스크들은 그들이 안전장치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워터게이트 기사가 지면에 실리기 위해서는 세가지 규칙이 있었다. 그 기사를 최소한 한 명의 최고 편집 책임자가 읽고 승인을 할 것, 다른 매체의 워터게이트 기사는 반드시 하나하나 재확인을 한 다음에 기사화할 것, 어떤 일련의 사실들이든 최소한 두 개의 독립된 취재원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등이었다."

 

(144p.)

" 그리고 우드워드와 번스틴이 어떤 식으로 무자비하게 파고 또 파서 사실들을 밝혀낼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들이 자료들을 하나하나 골라 모았는지, 어떻게 수없이 많은 인터뷰를 해냈는지, 늦은 밤에 어떤 식으로 겁에 질린 취재원들의 집 문을 두드리고 다녔는지를 이야기해줄 수 있어야 했다. 두 기자의 손에 거저 건네진 건 거의 없었다. 그들은 아무리 작은 정보도 하나씩 치열하게 싸워서 손에 넣었다. 거기에는 낭만도 영광도 없었다. 그들은 수없이 막다른 골목에 부닥쳤다. 거의 잠도 자지 못했다. 먹는 것도 형편없었다. 사교생활 같은 것도 없었다. 매일 수십 통씩 전화를 걸었고, 주면 주, 달이면 달마다 그래야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싸웠고, 데스크들과도 싸웠고, 백악관과도 싸웠다."

 

(158p.)

"그들은 수없이 되풀이해서, 자기들의 임무는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고 청중에게 이야기했다. 그들은 기자였기에 한 조각 한 조각 사실들을 발굴해서 마침내 전체 그림이 떠오를 때까지 탐사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자유 언론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거물 언론인 월터 리프먼의 이론과 꼭 맞아떨어졌다. 1974년 12월에 작고한 리프먼은 언론이 아무런 제약없이 보도를 할 수 있을 때 진실은 필연적으로 밝혀지지만, 한마디로 완벽한 전체로 저절로 쏟아져 나오는 일은 결코 없다고 말하곤 했다."

 

(158p.)

"그는(우드워드) 자기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다른 언론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당시 워싱턴에는 관청 쪽 입장에서 쓰인 배포기사에 대한 더러운 애착 같은 것이 있었어요. 명성 높은 기자들은 순전히 속기사였고요. 워터게이트 사건은 그렇게 베껴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입니다.' 당시 30세의 우드워드는 [보스턴 글로브]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95p.)

"기자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위대한 인물이든 말단에 있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든 모든 취재원에게는 기자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개념이다. 취재원이 하는 말이 진실이며 기자와의 비밀스러운 관계에 내포된 약속에 충실하기만 하다면, 기자는 그의 이름을 공개하기보다는 차라리 감옥에 가야 한다." 번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204p.)

"딥 스로트가 언론계의 전설이 됨으로써 워터게이트 사건이 남긴 유산은 기자들이 비밀 취재원을 기사에 인용하는 일을 편하게 느끼게 됐다는 점이다. 그런 취재원이 기사 보도에 대단히 소중하고 효율적인 수단이라는 사실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경쟁의 압력이 크기 때문에, 지나치게 많은 신문이나 방송기자들이 지나치게 빨리, 어떤 때는 상대방이 요청하기도 전에 익명을 허용한다. 익명의 취재원을 과용하는 것은 언론의 가장 가치 있는 자산인 신뢰성을 해치는 일이다."

 

(333p.)

"논객 레나타 애들러는 취재원을 밝히지 않는 데 대해 철저히 반대했다. 그녀는 이런 방식이 '그 이야기들의 사실 여부를 거의 증명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을 조사해서 쓰는 기사라면 모두가 가장 큰 핵심 요소로 삼고 있는 문제를 감춰버린다. 즉 '누가 이것을 알리고 싶어 하는가'하는 문제 말이다'라고 비판했다.

 

왜 취재원은 그에게 그런 얘기를 했는가? 그 취재원이 대중에게 알리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취재원의 숨겨진 동기는 무엇인가? 개인적 원한인가, 공익 정신인가?"

 

(334p.)

우드워드는 말했다. "그건 어떤 기자가 상상으로 만들어냈거나, 발신자 주소 없이 타이프용지에 쳐서 우편으로 부쳐온 편지들을 가지고 쓴 기사가 아니었습니다. 기자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것을 소중히 키우면 반드시 보답을 받습니다."

 

(413p.)

"우드워드는 자기가 취재한 이야기들을 분석하지 않았다. 그 점 때문에 책을 낼 때마다 광범위한 공격을 당했다. 그러나 그것은 밥 우드워드란 인물의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우드워드가 취재한 사실들을 해석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만, 그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우드워드가 한 사람의 기자, 즉 사실들을 취재하는 사람이며 대중이 좀 다른 사실을 원하더라도 자기 본분을 벗어나서 그 이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드워드는 분석 같은 건 역사가에게 남겨두는 편을 좋아했다."

 

(414p.)

"우드워드는 전통적인 탐사기자들과 달리, 몇 시간씩 문서자료를 파고들면서 세월을 보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의 수줍음을 감안한다면, 놀랄 만큼 대화의 기술도 좋았다."

 

(415p.)

"밥은 정말 자기 의견이 별로 재미가 없다고 믿고 있어요. 자기가 할 일은 아무도 얘기하지 않은 채 묻혀버릴 수 있는 비밀을 세상의 밝은 곳으로 끌어내는 일이지, 자기 의견을 말하는 일은 아니라고 믿고 있지요." 그린버그가 말했다. 그의 접근 방식은 언제나 사실만을 제시해주고 독자에게 판단을 맡긴다는 것이었다.

 

(420p.)

우드워드는 사안의 맨 밑바닥까지 파고들어가는 일(그리고 그에 관해 베스트셀러 책을 써내는 일) 말고는 어떤 다른 일정도 없었다. 대중이 더 많은 정보를 공유할수록,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 기능을 잘하게 된다는 강한 확신이 그가 일하는 동기라고 할 수 있다.

 

(448p.)

우드워드는 언제나 정부가 좀 더 개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또한 취재원은 기사를 쓰지 않는 조건으로 기자와 이야기할 수 있으며,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믿음이 배신당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것이 마크 펠트(딥 스로트)가 우드워드에게 남겨준 유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