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쓰다/수상2(隨想二)

2003년,가족은 해체중./작문

by K기자 2013. 3. 25.

2003년,가족은 해체중./작문

#101. 어머니 아버지가 드디어 갈라 섰다. 몇 년 전부터 따로 살던 그들은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만 참자며 합의를 봤단다. 과연 호구조사를 하는 대학교는 없었고 내 부모가 이혼한 사실을 알고 싶어하는 친구들 역시 없었다. 생활비와 학비를 대주는 대신 나 혼자 살아야할 것이라고 조심스레 말하는 그들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니, 해줄 수 있는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들이 갑작스레 이혼하는 것도 아닌데다가 나도 충분히 준비했기 때문에 그들이 나보고 혼자 살라는 얘기를 들을 때도 그저 담담하게 듣고만 있었다. 울음을 터뜨리며 나를 끌어 아는 어머니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조금 곤란하기만 할 뿐이다. 

#102. 수업을 마치고 옥탑방으로 돌아온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저녁상이 보자기에 덮여 있다. 이번에는 꼭 설거지를 하라는 H의 메모도 곁들여 진 채. 보자기를 들춰내고 밥을 먹는다. 확실히 H는 P보다 음식을 잘 한다. P는 아무 부족한 것 없이 자라서인지 내게 바라는 것이 없어서인지 음식할 때마다 신경질을 부렸다. 결국 P는 무표정한 내 얼굴이 싫다며 나갔다. 그 자리에 H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왔다. 내가 그녀와 같이 살고 싶은 이유는 그녀도 나처럼 이혼한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처지라는 한 가지 사실 때문이다. H와 같이 산 지도 어느덧 반년이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다 H와 결혼을 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부족한 나와 역시 결핍한 H가 결혼을 하면 둘의 상처가 아물어질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상처를 낳을 것인가. 잘 모르겠다. 

#103. 설거지를 마치고 방에 드러누워 텔레비전을 켰다. 호주제를 놓고 패널들이 옥신각신 싸우고 있다. 한복을 입고 나온 패널이 얼굴을 잔뜩 지푸린 채 말한다. 어떻게 사람 성씨를 바꾸도록 할 수 있냐며 목에 핏대를 세운 채 말한다. 그는 호주제가 없어지면 가정의 따뜻함도 없어질 것이고 그 때 가면 우리도 끝이라고 덧붙인다. 그러고는 가위모양을 한 자기 손을 목에 갖다 붙이며 자르는 시늉을 한다. 뎅겅. 채널을 돌렸다. 뉴스 앵커가 뉴스를 읽고 있다. 우리나라 이혼율이 세계 2위고, 이혼 증가율만 따지고 보면 세계 1위란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이것은 교통사고 사망률 1위보다도 부끄러운 기록이라며 이보다 더 개탄스러울 수 없다는 표정이다. 과연 그럴까? 잘 모르겠다. 

#104. 이어지는 기사는 우리나라 가족 현실을 다루는 시리즈물이다.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를 한 사람들이 우리나라 가족해체 현실을 증언하고 있다. 나는 모자이크 처리 안하고도 저 같은 얘기를 해 줄 수 있는데 저 기자 만나서 인터뷰나 할까. 정작 결손가정의 산물이자 가족해체의 피해자인 나는 이렇게 담담하기만 한데 저 앵커나 기자들은 왜 저리도 흥분하고 있을까. 공포는 그것을 예측할 때가 가장 고통스럽다고 하던가. 행복한 가정의 번듯한 가장일듯한 그들이 나보다 더 호들갑을 떠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하지만 그들도 상황이 달라지면 그렇게 흥분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 그리고 깨달을 것이다. 가족 없이도 그다지 힘들지 않게 살 수 있음을. 

#105. 2003년 9월 대한민국의 가정은 해체중이다. 그리고 미래는? 오리무중이다. 


1546자. 2003년 9월 28일 작성.

'쓰다 > 수상2(隨想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여운 캐리커처  (0) 2015.07.11
이쑤시개를 아는 몸이 되었다  (0) 2015.06.30
MB 프렌들리 조중동/냉전  (0) 2013.03.25
D-2/냉전  (0) 2013.03.25
'라인업'/냉전  (0) 2013.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