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쓰다/수상2(隨想二)

言(작문)

by K기자 2013. 3. 25.



言(작문)


동양에서 말 잘하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기 그지 없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남과 토론을 해 지게 되더라도 순순히 패배를 받아들이거나 상대방의 허술한 논리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말만 번지르르하다’고 그 사람의 인격을 깎아 내리기 일쑤였다. 직접 표현을 하는 것보다 행간에 의미를 숨겨 표현한 글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작금의 문단시류만 봐도 그렇다. 심심상인, 염화미소처럼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의사소통의 최고경지로 삼는 불교의 전통을 보면 동양인들이 얼마나 달변가를 평가하는 데 인색한 지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반면 말 잘하는 사람에 대한 서양인의 평가는 동양인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서양인들에게 사상과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준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은 행정가 혹은 교육자가 되려는 사람은 남달리 말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과 논리가 뛰어난 인재만이 나라를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웅변가를 존경하고 웅변학과 수사학이 학교 교과목 중 하나일 만큼 달변가에 대한 그들의 전통에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텔레비전 토론에서 지는 후보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될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우스개소리가 나올 정도다.


이렇게 동서고금에 따라 서로 다른 말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이어졌는가. 적어도 겉으로만 보면 달변가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이전보다 많이 나아졌다. 우선 정치분야에 있어 말과 논리가 대접 받는 분위기를 들 수 있겠다.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텔레비전 토론에서 말과 논리로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을 당선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밀실 정치, 몸싸움으로 대표되던 우리 정치가 부족하나마 대변인 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저간의 사정을 봐도 그렇다. 바야흐로 우리 정치에 말과 논리가 중요하게 대접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겉이 달라졌다고 속까지 바뀐 것은 아닌 듯하다. 영미식 토론문화가 아직 완전히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닌 탓이라고는 하지만 말보다 몸이 논리보다 감정이 먼저 앞서는 우리 정치인들의 구태의연한 모습이 그렇다. 정책정당을 구상한다는 집권당의 신주류와 민주화의 본산임을 자처하는 집권당의 구주류가 온 몸으로 보여준 추태가 대표적인 예다. 정치자금을 받아 놓고도 그런 사실 없다고 발뺌하는 거짓말을 하는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말을 신중하게 해야할 정치인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말의 의미를 깔보고 말이 주는 무게를 깔보는 것을 밥 먹듯 하니, 말을 신중하게 평가한 우리 조상들의 태도가 오히려 현명하게 보이는 요즘이다. 


말에 대한 동양과 서양의 평가가 다르다고 해서 양 쪽이 바라보는 가치가 서로 모순되지는 않을 것이다. 말을 삼가는 동양의 전통이나 말과 논리를 중시하는 서양의 전통 모두 말이 갖는 힘과 그것이 몰고 올 영향력을 크게 보는 데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다. 우리 사회, 특히 우리 정치에 있어 말을 바라보는 평가는 사뭇 어지럽다. 정치인들은 비록 겉으로는 말과 논리가 거침없이 펼쳐 나오는 서양의 전통을 따르더라도 그것이 어떤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고 그 배경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한다. 아울러 우리 조상들이 말을 삼가면서 말의 힘을 경계했던 그 의미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618자


언론사 시험 준비하던 2003년 작성

'쓰다 > 수상2(隨想二)' 카테고리의 다른 글

6.15 남북정상회담 3주년에 즈음하여(논술)  (0) 2013.03.25
스와핑(작문)  (0) 2013.03.25
한글날(작문)  (0) 2013.03.25
비(작문)  (0) 2013.03.25
스승(작문)  (0) 2013.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