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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수상1(隨想一)

2020.9 한겨레

by K기자 2021. 5. 22.

이희규씨는 <광주 문화방송>이 재작년 만든 5·18 다큐 <두 개의 일기>(부제 윤상원과 전태일, 항쟁의 뿌리를 탐구하다)에서 전태일의 학창 시절을 증언했다. 대구에서도 방영된 이 다큐는 <대구 문화방송>의 후속 ‘전태일 다큐’로 이어지며 지난해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이 만들어지는 디딤돌이 됐다. 왼쪽부터 김채원 전태일의 친구들 상임이사, 이희규씨, <두 개의 일기>를 만든 <광주 문화방송> 김철원 기자. 사진 전태일의 친구들 제공

 

"태일이 편지에 '공장 차려 어려운 아이들 돕겠다' 했었죠"

강성만 입력 2020. 09. 06. 19:36 수정 2020. 09. 07. 02:46 댓글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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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전태일 열사의 스승' 이희규씨

전태일 열사의 스승 이희규 전 청옥고등공민학교 교사. 전태일의 친구들 제공

올해 50주기를 맞은 전태일(1948~70) 열사는 생전 수기에서 1963년 만 15살 무렵 다녔던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로 꼽았다. 고등공민학교는 가난 탓에 중학교 진학이 어려웠던 아이들이 다니던 야간 학교다. 전태일은 수기에 “(청옥고등공민학교) 50분 수업시간이 너무 짧은 것 같다. (… ) 고등공민학교 대항 체육대회가 있던 날에는 너무 흥분해 새벽 4시 전에 깨어 준비운동을 했다”고 적었다. 태일은 채 1년도 안 됐던 청옥 시절을 “정말 하루하루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고도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집안일을 도우라며 학교를 그만두라고 했을 때 태일은 “뇌성 번개가 세상을 삼키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청옥 시절을 뒤로하고 서울에 온 태일은 1965년 가을 평화시장 시다로 일하면서 이희규(80) 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태일이 청옥 교사 중 가장 존경했던 선생님이었다. “태일이가 평화시장에서 일할 때부터 편지를 보내왔어요. 보통 한 달에 1통, 많을 때는 3통도 보냈어요. 나도 꼬박꼬박 답장했죠. 태일이가 죽기 한 달 전까지도 편지가 왔어요. 70통 가까이 받은 것 같아요. 그런데 이사 다니다 편지를 다 분실했어요.” 지난달 28일 대구 자택에 있는 ‘열사의 스승’을 전화로 만났다.

스승은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부’를 강조했단다. “오로지 공부해야 성공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글 모르면 학교 급사도 못 한다고요. 태일이 시다에서 재단사가 됐다고 알려왔을 때는 많이 기뻤어요. 청옥에서 그 정도라도 공부했으니 빨리 재단사가 됐구나, 청옥의 공부가 도움됐구나 그렇게 생각했죠. 재단사가 된 뒤 태일이 편지에서 앞으로 직접 공장을 차려서 어려운 아이들과 같이 하겠다고 해요. 그 편지에 ‘네가 할 일이 그거다. 어려운 아이들 돕고 살아라’고 답을 보냈어요.”

아래 맨 오른쪽이 청옥 시절 이희규 선생님이다. “아쉽게도 태일과 찍은 사진을 찾을 수 없어요. 사진 속 학생들은 태일이 1년 후배들 같아요.“(이희규씨) 이희규씨 제공

태일보다 8살 위인 스승은 1963년에는 청옥 2년차 청년 교사였다. 계명대 교육학과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와 복학한 뒤였다. 그 시절 청옥의 선생님 30여명은 모두 경북대·계명대·효성여대·대구대(현 영남대) 재학생들로 무보수 자원봉사자였다. 태권도 3단(현재는 9단)에 <대구방송> 합창단원이기도 했던 그는 청옥에서 역사와 음악을 가르쳤다. “선친이 초등학교 교장을 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교육에 관심이 많았죠.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어렵게 살았어요. 그래서 어려운 사람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했죠. 어려운 사람들은 서로 통합니다. 태일이는 청옥을 다닐 때도 낮에는 구두를 닦았어요. 청옥 학생들의 60% 정도가 졸업했는데 태일이는 가난 때문에 중도에 떠나야 했죠.”

그는 1967년 청옥을 떠나 경북 상주와 의성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했다. 71년엔 도장을 접고 경북태권도협회 사무국장으로 옮겼다. 그 뒤로 경북과 대구체육회에서 운영과장 등으로 일하다 2000년 퇴직했다.

스승은 제자의 죽음을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 “한 달 가까이 편지가 안 왔어요. 그러다 뒤늦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죠. 그 순간 참 아까운 별이 갔구나 생각했죠. 태일이는 통솔력이 있었고 정의롭게 살았어요. 그 이상 더 볼 게 없는 사람이었죠. 태일이를 보면서 ‘넌 앞으로 훌륭하게 되겠구나’ 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가니 슬펐죠.”

1963년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 ‘교사’ 중학 진학 못한 아이들 위한 야간학교 “태일이는 뭐든 바르게 하려던 정의파” 평화시장 시다 시절부터 70여통 편지 한달쯤 편지 끊긴 뒤 ‘분신’ 소식 들어

“50주기 기념사업 지자체 관심 아쉬워”

제자는 서른이 다 되도록 총각인 스승이 안타까워 직접 중매를 서겠다는 제안도 했단다. “1969년인가 70년인가 태일이 서울로 오라고 해서 남산에서 만났어요. 그때 태일이 같은 직장에 있다는 여성 한 명을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켰어요. 태일이는 중매를 염두에 두고 그 여성과 같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때는 그런 눈치를 채지 못했어요.”

태일은 어떤 학생이었을까. “덩치가 좋고 정의파였어요. 삐딱한 것은 못 봤죠. 뭐든 바르게 하려고 했어요. 자질구레한 것도 바로바로 학교에 건의했어요. ‘선생님 필기가 너무 많아요, 덜 적게 해주십시오’ 그런 말도 나서서 했죠. 공부도 무척 열심히 했어요.” 그는 “태일이의 고집이 너무 세서 누구라도 안아주고 다스려주지 않으면 튕겨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단다. “자칫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을 것 같아 누군가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했죠. 어려운 사람들은 같이 지내다 보면 끝없이 도와주고 싶어요. 태일이와 서로 한 덩어리가 되자고 생각했죠. 마음이라도요.”

이희규씨는 <광주 문화방송>이 재작년 만든 5·18 다큐 <두 개의 일기>(부제 윤상원과 전태일, 항쟁의 뿌리를 탐구하다)에서 전태일의 학창 시절을 증언했다. 대구에서도 방영된 이 다큐는 <대구 문화방송>의 후속 ‘전태일 다큐’로 이어지며 지난해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이 만들어지는 디딤돌이 됐다. 왼쪽부터 김채원 전태일의 친구들 상임이사, 이희규씨, <두 개의 일기>를 만든 <광주 문화방송> 김철원 기자. 사진 전태일의 친구들 제공

태일은 평화시장 시절 차비를 아껴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곤 했다. “그 버릇 어디 가겠어요. 학교 다닐 때도 그랬어요. 어릴 때 버릇 여든까지 가잖아요. 사회 가서도 그랬을 겁니다.”

청옥의 선생님들은 지금도 ‘청옥동우회’를 꾸려 석 달에 한 번 정도 만난다. “회원 11명이 모임에 거의 다 나옵니다. 회원 중 태일이에 대해 나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전태일 기념사업이 어떻게 추진되는지 멀리서라도 지켜보자고 합니다.”

그는 지난 몇 년 태일을 위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 도움을 주고 있다. “5년 전 전태일 45주기 때 청옥동창회를 통해 이희규 선생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어요. 그 뒤로 방송 출연 등 전태일 열사 추모와 관련해 여러 차례 요청을 드렸는데 너무너무 흔쾌히 응해주셨어요. 전태일 열사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세요.”(김채원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 상임이사)

전태일의 친구들은 태일이 청옥 시절 살았던 대구 남산동 집을 매입해 오는 11월 50주기에 맞춰 전태일기념관을 열 계획이다. 집값 4억5천만원 중 1억5천만원이 아직 모자란 상황이다.

스승은 인터뷰 끝에 이렇게 말했다. “대구에 전태일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요. 분신해 죽었는데, 어렵게 살다 그리됐다고들 해요. 나쁜 활동 한 거 하나도 없다고요. 안 좋게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다만 자치단체에서 전태일기념사업에 거의 도움을 주지 않는 거는 아쉽죠.”

(후원 계좌. 대구은행 전태일의 친구들 504-10-351220-9)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