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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수상2(隨想二)

신용카드/논술

by K기자 2013. 3. 25.

신용카드/작문

최근 전국을 시끄럽게 했던 파주은행 권총강도 사건의 범인이 잡혔다. 범인은 카드 빚을 갚기 위해 이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얼마 전 아이들과 함께 동반자살해 주위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던 가정주부의 자살동기 역시 남편이 진 카드 빚 때문이었다. 힘겹게 행상을 하며 살다가 동반 자살한 어느 노부부 역시 아들의 카드 빚을 갚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살인, 강도, 자살사고 등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범죄와 사고를 유심히 살펴보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사고의 유형은 다양하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서 카드 빚이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신용카드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지폐와 동전을 대체하는 새로운 화폐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넘쳤다. 은행이나 현금지급기를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어져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게 될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게다가 돈과 관련해 투명한 사회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낳았다. 신용카드를 쓰다 보면 출처와 사용처가 분명해 세금을 빠짐없이 거둘 수 있고 탈법적 자금의 흐름을 줄일 수 있다는 예측이 많았다. 

신용카드가 도입된 지 20년이 지나고 많은 이들이 신용카드로 생활하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신용사회를 맞는 소회는 애초의 기대와 많이 다르다. 신용카드 사용은 늘었지만 탈세와 검은 돈이 여전히 횡행하는가 하면, 돈을 제 때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라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돈을 인출하기 위해 들였던 번거로움을 없애는 것이 능사인 줄만 알았지, 이 같은 부작용을 낳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인출과 대출의 편리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소비와 지출을 편리하게 여기는 풍조로 변질됐다. 은행이나 타인으로부터 돈을 빌릴 때 담보를 걸고, 보증인을 세우는 등 그 절차를 까다롭게 하는 것은 돈 갚기가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흔히 인체의 혈액으로 비유되곤 한다. 제 때 알맞은 곳에 피가 통해야 우리 몸이 건강하듯이, 돈 역시 제 때 제 곳으로 흘러야 자본주의가 유지될 수 있다. 때문에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일은 신중하고 엄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용카드는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절차를 지나치게 가볍게 만들어버렸다. 누구나 쉽게 돈을 빌려 쉽게 쓸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돈을 빌려주는 절차가 간소화됐다고 해서 신용카드가 자본주의 사회의 룰을 바꿨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돈을 빌려주는 절차가 간편해졌다고 해서 돈을 갚는 형식 역시 유연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통장에 여유 돈이 없는 사람이 정해진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할 경우 신용불량자 낙인을 받는다. 액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신용카드 회사로부터 추심을 받아 재산을 가압류당하기도 하는가 하면, 취업이나 대출이 불가능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지기도 한다. 신용카드는 자본주의의 룰을 간편하게 한 주인공이 아니라 가면 뒤에서 자본주의의 가장 냉혹한 특징을 감추고 있는 대표상품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신용불량자 3백만 시대가 되고나서야 뒤늦은 대책을 발표한 정부조치는 늦었지만 다행이다. 무분별하게 발급만을 일삼았던 카드회사들 역시 가입자 자격요건을 강화하고 사업확장을 자제하는 등 성의를 보이고 있다. 신용불량이 범죄로 이어지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도 그렇고, 신용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 이런 조치들은 진작 취해졌어야 했다. 남은 문제는 신용카드 사용자들의 의식이다. ‘일단 쓰고 보자’, ‘당장 무슨 일이 있겠나’는 식의 생각들이 바뀌지 않는 한 정부와 신용카드회사가 내놓은 그 어떤 대책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사용자들은 ‘신용이 사라지면 당신도 사라진다’는 섬뜩한 공익광고의 문구라도 진지하게 되새겨볼 일이다. 1809자 


2003년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