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쓰다/수상1(隨想一)

식소사번아웃 2019.6.17

by K기자 2020. 12. 6.

6글자 요약. 식소사번아웃( 食少事煩 burnout)

 

성현석

2019년 6월 17일 

- 식소사번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고사. 사마의가 촉나라 병사를 포로로 잡았다. 사마의가 포로에게 주로 물어본 것은 군사 전략 정보가 아니라 제갈량의 식사량과 업무량. 다 듣고 나서 사마의는 아주 좋아했다.

"일은 많은데, 먹는 것은 적으니, 제갈량은 오래 못 버티겠구나."

어차피 <삼국지연의>는 원나라 때 지은 소설이다. 저런 고사가 역사적 근거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식사량을 넓은 의미의 인풋이라고 보면, 지금도 맞는 말이다.

아주 오래 전에, 기자질 하기 전에 한 컴퓨터 회사에서 개발자로 일했었다. 정말 매일 야근 했다. 내가 무식하고 멍청해서 개발 진도가 느렸던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야근을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였다. 그 속에 있을 때, 이런 문화는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여겼다. 육체 노동하는 분들은 새참도 드시고 고기도 드셔야 한다. 그래야 버틴다. 소프트웨어 개발은 정신 노동인데, 새로운 지식을 정기적으로 흡수해야 한다. 새참 챙겨 먹듯. 그런데 잦은 야근으로 진을 다 빼버리면, 그게 불가능하다.

이후 직업을 바꿨는데, 정신노동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글을 다루는 일은 소스코드를 다루는 일과 아주 닮았다. 일의 성격도 비슷한데, 정기적으로 새로운 지식을 흡수해야 결과물이 좋다는 점도 닮았다.

글을 다루는 일 역시 아웃풋에 비해 인풋이 너무 적으면 안 된다. 한때 뛰어난 통찰을 보였던 이들이 너무 쉽게 방전돼 버리는 모습을 자주 본다.

식소사번, 먹는 것은 적은데 하는 일은 많은, 그래서 오래 버틸 수 없는 상황과 똑같다. 단지 물질적인 식사냐, 지식 및 정보, 정서적 자극 등이냐, 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작가들을 보면, 글로 버는 수입보다 강연 수입이 훨씬 큰 경우가 많다. 대학 강의라면, 조금 다를 수 있겠으나, 일반적인 교양 강연은 내용이 대개 비슷하다. 강연 주최 측 역시 그러기를 원한다. 강연 하는 작가 입장에선 장소만 달라질 뿐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인풋보다 아웃풋이 훨씬 큰 구조다. 이런 생활을 오래 하고 나면, 지식과 통찰은 소모되고 감성은 녹이 슬어 버린다. 그 뒤로 내는 책은 작가라는 명함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인 경우가 많다. 당사자도 인정한다. 강연 요청을 계속 받으려면, 정기적으로 새 책을 내야 해서 책을 썼다고 한다.

이런 구조 역시 지속 가능하지 않다. 역량 있는 작가라면, 글 써서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직업에서 지명도에 따라 수입이 결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어떤 균형은 있어야 한다. 지명도에 비례한 수입이 80, 작품의 수준에 비례한 수입이 20. 이 정도는 괜찮겠으나, 지명도에 비례한 수입이 99.9, 작품의 수준에 비례해서 늘어나는 수입은 0.1. 이런 식이라면, 글을 잘 쓰는데는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지명도만 높이려 드는 자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부업에 쓰는 시간이 본업에 쓰는 시간보다 너무 긴 작가들을 보면, 안쓰럽다. 반면, 처음부터 목적이 부업이었는데, 마치 대외적인 본업에 애정이 있는 양 포장하는 이들은 가증스럽다.

안쓰러움과 가증스러움의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