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재기, 입담, 쾌활, 진정성, 실력을 이제 볼 수 없어... 아니다.
그가 없다는 사실 자체가 그저 슬프다.
노회찬은 내면으로부터 콸콸 기쁨과 용기, 분노와 지혜가 솟아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는 삶의 기쁨을 모두 찾아 누리며 인생을 풍요롭게 살았다. 여기서 <풍요>는 물론 물질적인 것과 무관한 풍요다. 한 인간으로 사랑받고 사랑을 전하며 문화와 예술을 마음껏 흡입한 자가 누리는 풍요였다. 그는 노동운동과 정치라는 자신의 방식으로, 뜨겁게 세상을 사랑하다가, 스스로의 원칙을 침해한 사건을 용서치 못해 그토록 사랑하던 세상과 결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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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버지는 시를 사랑한 원산도서관 사서였고, 어머니는 교사셨다. 아들의 이름도 본인이 좋아하던 북한 시인의 이름으로 지었을 정도로 아버지는 문학에 심취한 분이셨다. ("회" 자는 돌림자였으니, "찬"자를 북한 시인 "이찬"으로부터 가져오셨던 것 같다) 전쟁통에 이북에서 부산으로 피난 오신 두 분은 어려운 형편에도 오페라 공연이 있으면 빼먹지 않고 갈 정도로 예술을 가까이 하셨다. 그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그는 인생을 사랑할 수 있는 양분을 풍족하게 섭취하며 성장하였다.
어느날 옆집에서 들려오던 아코디언 소리를 듣고, 악기를 배우고 싶은 열망에 빠진 그에게 첼로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여전히 빠듯한 형편이었던 그는 수강생중 유일하게 선생님의 배려로 무료로 첼로 교습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경기고 시절, 이화여고 강당에 초대되어 독주를 하던 실력을 겸비한다. 고교 시절,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학교만 파하면, 친구들과 청계천 서점가를 뒤지고 다니며 사상계를 찾아 읽었고, 함석헌, 백기완의 강연을 듣는가 하면, 불교의 고승을 찾아가 질문하는 등, 일찌감치 사상적 방황을 하며 인생의 길을 모색했다.
언제나 책읽기에 굶주려 있어, 서점에 서서 책을 읽던 그에게 서점 주인이 집에 가서 읽으라고 책을 빌려주었고, 그는 집에 도착하기 전에 손에 든 책을 모두 읽어버려, 다시 서점에 돌아가 새 책을 빌려가기도 했다. 신간 소설은 모두, 새로 나오는 영화도 모두 보아야 직성이 풀릴만큼 그는 문화적 욕구에 가득 차 있던 소년이었다. 그는 왕성하게 세상의 아름다움과 고통을 흡수하면서 자신의 길을 모색했다. 그러다가 이스끄라 iskra (러시아어로 불꽃)라는 잡지를 접하고, 거기서 자신의 길을 발견했다. 그것은 노동 운동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
용접공이 되기로 한 아들의 선택에, 어머니는 "왜 하필 이 힘든 길을" 하며 아쉬워 하셨지만, 이후 흔들림없이 그의 길을 지지해 주셨다.
소시적 발산하던 예술적 욕망을 그는 평생 가꾸고 충족시키며 살았다. 8-9년전, 야인 시절 파리에 들르신 적이 있었다. 박용진 의원과 함께였다. 그 때, 우리집에서 식사하며 듣던 클래식 음악의 연원과 배경을 그가 정확히 알고 있어, 희완을 놀래킨 바 있다. 매년 통영 윤이상 음악제에 참석해 새롭게 창작되는 현대음악을 감상했고, 종종 그 악보를 구하여, 직접 연주해 보기도 했다. 허름하지만 고집있는 맛을 지켜가는 맛집들을 구석구석 알고 있어서 주변으로부터 맛집 책을 내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파리에서 식사를 나눌 때, 그는 평양방문에서 보았던 대동강의 하수도 시설에 대해 20분 정도 얘기를 했다. 그 수준이 마치 그 하수도 시설의 설계자가 직접 설계도면을 놓고 보여주면서 설명하는 듯 했다. 어디에 가서도 지적 호기심이 반짝반짝 발동하여, 세상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곳곳에서 발견하는 이 사람은, 그 충만한 재기를 제 인생을 충족시키는데 쓰지 않고,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 곁에서 함께 세상을 바꿔나가는 데 썼다.
그의 문상을 위해 줄을 선 그 어떤 정치인도 노회찬 보다 깨끗하지 않다. 더러움에 너무도 익숙하고, 그들에겐 지켜야 할 사상의 순결도 원칙도 없을 뿐.
* 2010년 9월 2일, 을밀대와 광화문 쪽 까페에서 만나뵙고 인터뷰한 내용과 2008년 파리에 오셨을 때 들은 내용들을 토대로 적은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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