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다음은 전교조 광주지부가 발행하는 광주 교사신문에 기고한 파업단상이다.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평소에 취재 때문에 많게는 하루 100통이 넘는 통화를 하던 나, 파업 중인 요즘은 하루 10통 안팎으로 크게 줄었다. 월급도 안 나오는데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기에 우울해 해야 함이 마땅하나 취재현장의 치열함에서 벗어나 한 숨 돌릴 수 있게 됐다는 점과 나를 찾는 이들이 좀 적어져서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은 다행(?)스러운 점이다. 요컨대 파업해서 좋은 점을 꼽으라면 나는 ‘전화를 덜 받을 수 있어서’를 들 것 같다.
그런데 최근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광주MBC가 파업을 하는지 모르고 제보전화를 걸어오는 시민들 때문이다.
“김기자님, 광주시청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취재 좀 해주면 안 될까요?”
“김기자, 내 아는 사람이 다단계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는데 좀 도와 주소"
벌써 몇 건이나 이런 식의 전화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파업복귀하면 가장 먼저 취재해서 보도해드리겠노라고 약속하고 전화를 끊지만 마음은 아리고 입에서는 단내가 난다.
시민들의 제보가 모두 기삿감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중에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취재해야 할 사안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금 시민의 제보를 받아도 그것을 취재하고 보도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공정방송을 요구하며 파업하고 있는 마당에 나 혼자 돌아가 보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언론사 파업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나쁜 사람들, 희희낙락하고 있을 권력자의 모습을 떠올리면 안타까움과 괴로움은 배가 된다.
하지만 이보다 더 괴로운 일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4·11 총선을 손 놓고 바라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주요 방송사들의 기자와 PD들이 파업을 하는 바람에 정부 여당이 바라는 대로 선거 보도가 흘러간 것이다. 정권 심판 의제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고 나꼼수 김용민의 막말이 선거 판세를 뒤집는 이상한 선거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언론사들의 총선보도가 최소한 여야의 기계적 균형이라도 맞췄다면, 표절논문 파문과 제수 성추행 논란으로 당선 이후에 새누리당을 탈당한 문대성, 김형태와 같은 인물이 당선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언론인들의 파업이 결과적으로 MB와 박근혜 위원장 좋은 일만 시키고 말았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어쩌면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여당은 지금과 같은 파행적 언론환경이 올 연말 대선 때까지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 보인다. 박근혜 위원장은 불감청 고소원의 심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언론인들이 파업을 접고 일선 현업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물론 파업 때보다야 조금 사정이 나아질 순 있겠다. 그러나 파업하는 언론인들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MBC 김재철, KBS 김인규 사장과 같은 부역 언론사 경영진이 물러나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대선 때는 이번 총선보다 더 한 최악의 편파방송이 전파를 탈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대로 파업을 풀고 복귀해 현장으로 돌아간다면 정의를 팽개치고 강자에게 부역했다는 언론인이라는 수식어가 평생 따라다닐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지만 광주MBC로서는 아픈 역사다. 1980년 궁동에 자리 잡고 있던 광주MBC 사옥이 시민들에 의해 불탔기 때문이다. 전두환 등 신군부의 요구를 받들어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묘사한 결과였다. 광주MBC 선배들을 비롯해 지금의 구성원들은 당시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며 반성하는 마음으로 지금껏 살아왔다. 그런데 32년이 지난 지금, 그 때와 비슷한 상황이 또다시 반복되려 하고 있다.
언론인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정의론의 유명한 석학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려면, 먼저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분인가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22명의 노동자들이 죽어간 쌍용자동차 사태는 1970년 전태일 열사가 일군 이야기의 한 부분이다. 정수장학회 사회 환원과 편집권 독립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고 있는 부산일보 기자들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로부터 시작돼 1979년 일어난 부마항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일부분일 것이다.
오늘 광주MBC 노동조합을 비롯한 여러 언론사들이 벌이고 있는 파업은 5·18과 6·10 항쟁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일부분이다.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게 서기 위해 오늘도 언론인들은 고민하며 싸우고 있다. 더 이상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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