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다 본 <스카이캐슬> 정주행을 오늘 아침에서야 끝냈다. 이 후련함이란.
드라마 잘 안 보는 내가 이걸 끝까지 봐야겠다고 결심한 건 정준호가 연기한 강준상 교수 캐릭터 때문이었다. 쿨한 척, 세상 욕심 없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은 강 교수가 다음 회차에서 어떤 말을 풀어낼 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캐릭터가 전형적이지 않았다는 점이 이 드라마의 매력이었다는 말이다.
김주영 쓰앵님(김서형)과 이수임 작가(이태란)는 전형적이라 할 만 했지만 한서진(염정아)과 노승혜(윤세아), 진진희(오나라)는 이보다 더 세속적일 수가 없으면서도 또, 현실감 있게 세속적이지 않아 좋았다.
캐릭터가 입체적이다 보니 화면 구석구석을 집중하며 볼 수밖에 없었다. 몸과 영혼이 뒤바뀌는 설정을 알게 돼 보고 싶은 마음이 확 떨어진 어느 방송사 드라마와는 분명 달랐다.
'두 손'을 클로즈업 한 것만으로도 사람을 집중하게 만들었던 연출력도 좋았고, MBC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의 염정아 누나가 곽미향이 돼 '아갈머리'를 조용히 씹어뱉을 때도 좋았다. 염정아의 단발머리 얼굴선은 어쩌면 이렇게나 단호하면서도 단아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깨는 장면도 없지 않았는데, 뭐 정관장 '아이패스h' PPL까지만 해도 그냥 참을만 했다. 그런데 예서 엄마가 엄마들 모임을 본죽 '홍게올린죽' 을 앞에다 놓고 하는 PPL에서는 정말이지 참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남들 다 욕하는 20회 결말이지만 난 황우주가 아빠 황치영 교수에게 말하는 저 대사 때문에 욕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황우주 왈, "힘은 아빠, 내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보다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뭘 위해 사는지 그게 선명할 때, 그게 뚜렷하고 확실할 때 나오는 거 아니에요?"
이 대사 친 작가를 만나 인터뷰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귀향길 기차에서 쓰는 뒷북 감상평
1. 마지막회
1-1. 쏟아지는 악평에 각오를 하고 봐서인지, 아니면 “그렇게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식 결말을 좋아하는 내 보수적 스타일 때문인지, 예상보단 재밌게 시청했다. 김주영과 한서진 면회 씬은 고레에다 감독의 <세번째 살인>을 떠오르게 했고, 모든 분이 쌍욕을 퍼부은 김주영과 이수임의 화해 씬에선 살짝 감동도 했다. 생각도 못한 차교수의 문학 감수성에는 빵 터졌고. 다시는 문과를 무시하지 마라.
1-2. 이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일까. 모두 이태란을 욕하는데 혼자 갸웃했던 중반부가 떠오른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민폐 캐릭인 건 알겠는데 이게 그 정도로 욕 먹을 일인가. 그러다보니 내 생각과 타인의 반응이 달라서 + 작가에 대한 찬사가 비난으로 급반전되어 신기했던 또 다른 드라마가 생각났다. 문근영이 여주로 나온 <청담동 엘리스>.
2. 뒤집어놓은 <청담동 엘리스>
2-1. 디자이너 지망생 문근영이 청담동의 패션계 인싸 박시후와 아웅다웅하다 사랑과 성공을 모두 이루어낸다는 전형적인 캔디 스토리. 그런데 모두 알고도 쉬쉬하는 청담동과 강남 상류층의 디테일을 정면으로 다뤄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웬걸, 문근영이 마음이 가난한 부자 박시후를 구원해줄 거라는 기대를 배신하고 그의 돈과 계급에 유혹당하는 내용으로 전개되자 비난이 폭주했다. 사랑의 이유에는 마음 뿐 아니라 재산, 지위, 계급, 외모 등 다양한 층위가 있다는 사실을 당시 시청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작가의 진보적 의도와 대중의 보수적 기대의 대충돌.
2-2. 이 작품은 반대인 것 같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보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며(“빌어먹을 한국사회 입시 시스템은 쉽게 바뀌지 않겠지”)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의 사랑이다.(“우주야 아빠는 항상 네 편이다”) 당연히 이태란은 정의의 사도이고 염정아, 정준호 등은 비난받아 마땅한 빌런이다. 나 또한 그 주제에 동의하며 작가가 풍자하려한 빌런들의 악행과 디테일을 즐겼는데 다른 이들은 달랐던 듯. 나에겐 ‘풍자’와 ‘디테일’이었던 포인트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주제의식’이었던 것 같다.
2-3. 이러쿵 저러쿵해도 한국사회는 진보했다. 예전처럼 사회와 인간을 납작하게 보지 않는다.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안다. 이 쪽의 선함이 다른 쪽에선 악함으로 해석될 수 있음 또한 이해한다. 그리고 거시와 도덕만큼 일상과 욕망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당근 알고 있다. 그런만큼 많은 이들은 스카이캐슬로 대표되는 악(?)의 구조보다 그 속 인간 군상의 욕망에 감탄했던 것 같다. 이들의 과한 계급적, 속물적 이기심은 만화적 설정으로 넘겨버리고 상승에 대한 욕망, 추락에 대한 불안, 모성애, 교육열 등 우리 모두 가지고 있는 감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에 열광했던 듯. 그러니 우리 모두의 감정을 부정하는 마지막회에 대실망을 할 수 밖에 없었고.
2-4. 프로그램 만드는 걸로 밥 벌어먹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작가에게 마음이 쓰인다. 나야 이렇게 글로 노닥거리면 끝이지만 그 분은 얼마나 놀랐을까. 하지만 작가가 가진 보수적+단순한 세계관과 반전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한국 드라마 판에서 가장 아끼는 재능이다. 이걸 좀 더 세련되게 다듬을 수 있으면 다음엔 더 띵작을 집필하실 수도 있을 듯.
3. 혁명보다 어려운 개혁. 최고의 연출
3-1. 드라마가 작가의 장르가 된 지 오래됐지만 여전히 감독은 중요하다. 특히 이 드라마는 연출의 힘이 두드러지게 보였다. 특히 전형성이 양질전환을 이룬 연기 연출과 편집으로 만들어내는 감정선의 밀당은 근래 본 드라마를 통틀어 최고.
3-2. 예상 외의 연기를 보인 배우는 한 명도 없다. 김서형은 <아내의 유혹> 여주의 교육코디 버전이고 염정아는 <로열 패밀리>의 여주의 헬리콥터 맘 버전이다. 배우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기보단 전형성에 기대는 연출. 그런데 그 전형성을 끝까지 밀고가니 양질전환이 일어난다.
한수진이 곽미향이란 사실을 알고 ‘소리없이 파안대소’하는 김주영 쌤의 ‘실루엣’. 김서형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뻔뻔할 정도로 차용했지만 그 뻔한 이미지가 아니었으면 절대 저 느낌이 안 났을 과감한 연출이다.
“아갈머리를 찢어버릴라”라는 한서진의 표독스런 대사 또한 마찬가지. 우리가 아는 염정아의 캐릭터를 극단까지 밀어붙여 또다른 차원의 연기를 수행게 한다. 배우 개인의 한계일 수 있는 전형성을 작품의 완성도로 만드는 저 능력. ㄷㄷㄷ
3-3. 감정선을 밀당하는 연출도 예술이다. 누구나 예측하는 포인트에서 쑥 더 들어가버리거나 능청스럽게 멈춰버린다.
빅타이트로 정준호가 “엄마 아들하면 안되요?”라며 절규하고 누가봐도 정애리의 우는 타이트샷이 나와야할 타이밍에 롱풀샷으로 튀며 한 호흡을 남겨둬버린다. 정준호만큼 괴로운 정애리의 감정까지 보게 만드는 능수능란함 + 이 정도에는 시청자가 도망가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
염정아가 경찰서에 자백하러 가는 씬은 또 어떤가. 누구라도 염정아 얼굴과 구두 타이트샷을 붙여 긴장감을 불어넣고 싶을 때 그냥 롱풀을 붙여버린다. 그리곤 저 멀리서 어깨를 늘어뜨린 염정아가 터벅터벅 걸어오는데 렌즈 바로 앞까지 올 동안 끊지 않는다. 그녀의 주저함과 자포자기와 괴로움을 모두 보여주는 세련된 연출. <연애 시대> 후 TV드라마에서 본 최고 세련된 감정선들이었다.
4. 조자룡 헌창 쓰는 그림 연출.
4-1. 그림을 다루는 솜씨는 더 대단하다. 사실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본 이유는 그림이다. 우직하지만 그래서 화려했던 촉한의 에이스 조자룡이 드라마감독하면 이러려나.
4-2. 일단 컷들. 처음 보는 이미지는 거의 없는데 조금 더 간다. 첫회 염정아와 오나라가 학원가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며 차에서 대화하는 씬. 눈 끝이 살짝 보일까 말까한 - 귀와 볼을 잡는 백샷으로 이들을 묘사한다. 정면샷이 아니므로 거리감이 생기며 관찰자로 이들을 보게 된다. 한심하지만 궁금한 대치동 엄마들을 몰래 보는 느낌이랄까. 놀라운 균형감이다. 영화처럼 아예 정면 백샷을 쓴다든가 차 외경을 붙인다든가 했으면 대중들이 도망갔을 것이고 일반 드라마처럼 정면 컷이었으면 이 느낌이 없었을 것이다. 대중의 감각과 자신의 의도 간 절묘한 타협.
4-3. 편집도 예술이다. 입이 떡 벌어지는 편집은 없지만 근래 본 대중드라마 최고의 편집이다. 모든 그림이 딱딱 절묘하게 붙는다. 빅타이트샷을 과감히 써 에너지가 넘치지만 <뿌리깊은 나무>처럼 거칠지 않고, 좋은 앵글과 유려한 리듬감으로 아름답지만 <미스터 션샤인>처럼 지루하지 않다. 좋은 드라마를 보면 참고용으로 하이라이트를 편집해놓는데 이 드라마는 그런 장면이 너무 많아 포기했을 정도.
4-4. 메타포를 배치하는 솜씨는 이 드라마의 모든 미덕을 통틀어 최고. 생각도 못한 기막힌 상징이나 대사는 없는데 딱 시청자가 감당할 수 있는 수위에서 막 날린다. 기대 없던 첫 회부터 성모상 인형(모성애)으로 뜨아하게 만들더니 모두가 욕한 마지막회도 염정아 나간 후 거울에 비친 김서형 얼굴(분열된 엄마 또는 교육관)로 허덜덜하게 한다. 그 사이는 말할 것도 없다. 자주 나온 염정아의 분열된 거울 이미지(모호한 진실 또는 혼란), 김서형의 블라인드 미장센(훔쳐보는 또는 자르는 음모), 신호등(염정아 또는 예서의 진로) 등 더 숨기면 아무도 이해 못하고 더 보이면 유치해질 아슬아슬한 선상에서 은유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매주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5. 언제나처럼 많이 길어졌으므로, 사실은 더 쓸 말 많지만 고향에 거의 도착했으므로 여기서 급 마무리.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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