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사실과 의견>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성추문으로 미국의 위신이 수렁에 빠져 있을 때 미국 행정부와 의회는 르윈스키의 속옷자락에 묻어 있던 대통령의 정액 몇 방울을 기어코 찾아냈다. 조사활동이 사실을 향해 접근해가는 과정에서 미국이 당한 치욕과 조롱은 끔찍한 것이었다.
백악관 집무실에서 벌어진 이 엽기적인 치정사건을 구경하면서 사람들은 분노하면서도 낄낄거렸다. 대통령의 정액을 기어코 확인하는 것은 나라의 위상을 훼손하는 일이며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미국 내 여론도 만만찮았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그 파멸적 치욕과 조롱을 감수해가며 기어코 대통령의 정액을 확인해냈다. 그 과정은 치욕의 사실을 사실로서 정립함으로써 치욕을 씻어내는 장엄한 드라마였다. 그리고 미국은 그 말라빠진 정액 몇 방울의 흔적에 의해서 사태를 인식하고 수습해나가는 토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미국 전투기들이 수단을 폭격하고 있던 시간에 대통령의 집무실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가를 알게 되었다. 이 정액 몇 방울의 '사실'은 미국을 치욕의 수렁에서 건져주었고 클린턴은 오히려 이 '사실'의 힘에 의하여 남은 임기 동안 대통령의 권능을 보존할 수 있었다. '사실'은 아무리 치욕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이미 정의를 내포하고 있으며, 여론이 사실을 몰고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여론을 이끌고갈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클린턴의 정액은 입증해주었다.
사실, 나는 여론이라는 신기루의 작동방식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정체와 본질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소박하게 말해서, 여론에 따라서 상황을 인식하고 판단하며 여론에 따라서 선악을 가늠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면 나는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의미의 민주주의자가 아닌 것을 조금도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로 비롯된 이 전방위의 권력투쟁은 처음부터 사실관계를 규명하려는 노력보다는 여론몰이의 방식으로 전개되어왔다. 고발된 언론사 사주들에 대해서는 검찰수사가 시작되지도 않았고, 그들의 혐의가 무엇인인지 정확히 입증되기 전부터 '구속 불가피론'과 '구속 불가론'이 서로 적대하면서 부딪쳤다. 그 두 개의 적대하는 여론은 발생한 여론이라기보다는 조성된 여론이었다. 사실의 기초가 없는 이 적대하는 여론 군(群)은 신기루처럼 보인다. 적대하는 진영들은 이 신기루 속으로 또 다시 '여론'을 끌어들이고 있다. 적보다 숫자가 많고 적보다 공격적인 여론을 끌어들이는 쪽이 이 싸움에서 이긴다는 싸움의 방식을 적대하는 진영들은 공유하고 있다. 다들 격렬한 언설을 한바탕씩 토해낸 다음 '국민이 심판할 것이다'라는 협박을 후렴으로 달고 있다. 이 말은 내 편이 더 많다는 전략적 선전에 불과하다.
이 때의 국민은 허수아비와 똑같다. 사실의 기초가 없이 '국민'이 무엇을 판단할 수 있으며, 이 사실관계를 국민이 판단해야 한다면 검찰은 왜 있고 국회는 왜 있으며 언론은 왜 있는가. '국민이 심판할 것이다'라는 협박은 민주주의의 탈을 쓴 파시즘에 불과하다. 이 파시즘은 사실을 사실로서 정립시키지 않고 사실을 대중의 정서 속에 은폐시킴으로써 권력에 접근하려는 기만술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기만술은 대중을 끝없이 무지몽매 속에 처박아놓음으로써만 가능하다.
'국민이 심판할 것이다'는 협박은 이른바 국민을 민주주의 주체로서 존중하는 척하면서 바보로 만들어가고 있다. 바벨탑을 쌓던 시절처럼 언어는 무너져내리고 있다. 언어가 무너지면 그 사회의 모든 구조물들이 무너져내린다.
국세청의 추징액수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가. 세무조사가 김정일의 답방을 위한 정치작업용이라고 생각하는가. 고발된 언론사 사주가 구속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가. 대중을 향해 내미는 이런 질문들은 타락하고 무내용한 바벨탑의 언어일 뿐이다. 그 질문들은 아무런 사실에도 입각해 있지 않고, 대답하는 사람의 정서를 한 방향으로 몰고 가서 정치권력화하려는 의도를 감추고 있다. 그 몽매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몽매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 몽매들을 한데 끌어모아 싸움에서 이기려 한다면 누가 이기든 이 사회는 희망이 없다. '사실'이 먼저 있은 후에 '의견'이 있을 뿐이다. 사실이 여론을 이끌고 가는 세상이 민주주의다. 여론이 사실을 뭉개버리는 세상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언론의 부자유가 언론의 자유다>
언론자유의 근본은 언론의 부자유이다. 이 부자유는 가혹한 자기검열에서 온다. 자기검열이 없는 언론은 유언(流言)이다. 언론은 당대의 사실을 당대에 말해야 한다. 당대의 사실을 당대에 말하지 않고, 한 몇년 묵혀두었다가 비화(秘話)라고 해서 팔아먹는 것은 언론이 아니다. 언론은 풍문과 싸워야 하고 비화없는 세상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
언론의 자기검열은 이념이나 지향성에 의한 통제행위가 아니라 우선은 사실과 의견을, 존재와 가치를 구별하는 통제행위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아마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거의 불가능 쪽에 가까운 일이다. '사실이 갖는 층위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사실'은 그것을 관찰하고 전달하는 자의 주관 속에서 재편성되고 재해석되며, 의미를 부여받거나 의미를 박탈당한다. '사실'이 객관적이고 '의견'이 주관적이기에 앞서서, '사실'을 만지고 거기에 다가가는 인간의 시선이 이미 주관적이다. 단순한 교통사고나 화재사건, 살인사건조차도 그 전후 맥락과 의미 내용을 완전무결하게 객관적으로 전달할 수는 없다. 나는 '사실'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의견' 앞에서 식은땀을 흘린다. 사실과 의견은 적대적이다.
의견은 사실을 비틀고, 사실은 의견의 틀 안에 갇히지 않는다. 인간의 현실은 인간의 가치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 아니다. 언론의 자유는, 분리되지 않는 의견과 사실을 기어코 분리시켜 놓으려는 가혹한 부자유의 소산인 것이다. 언론은 가치나 의견을 일체 떠난 세계의 알몸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너는 개자식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언론의 자유가 아니다. "이것은 무엇인가"에 답하는 것이 언론의 자유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결국은 부자유다. 이 부자유를 스스로 수용하는 것이 언론의 자유다.
정치권력의 언어는 추상화되어 있고 이념화되어 있다. 권력의 속성은 언어를 추상화함으로써 삶의 구체성을 배반한다. 정치언어의 뻔뻔스러움은 이 추상성 속에 서식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는 이 추상화된 권력의 언어와 맞서는 사실적 언어를 확보하는 데 있다. 언론의 자유는 사실로서 가치를 지향하는 과정일 뿐이다.
지금 언론의 개혁을 말하는 사회적 공론은 편집과 경영의 분리를 가장 중요한 논점으로 삼고 있다. 편집권의 독립이라는 것인데, 이 거룩한 목표를 법제화하겠다는 것이 그 공론의 핵심부다. 내 생각에, 이것은 언론과 사회의 현실을 도외시한 잠꼬대 같은 소리이다. 이 잠꼬대를 법제화하겠다는 것이 무슨 소리인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신문경영자는 신문편집에 간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간여가 정당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언론의 전통이 훨씬 오래된 나라들에서도 언론의 위기를 돌파하고 정치권력과의 갈등 속에서 언론의 자유를 방어해 내는 싸움에서 언론경영자들은 핵심적이고도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따. 그들의 역할수행은 물론 신문제작에 대한 간여를 통한 것이었다. 편집권의 독립이 법제화되고, 그렇게 법제적으로 독립된 편집권이 언론의 자유와 책임을 이상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그야말로 책상물림들의 공리공론인 것이다. 그것은 대학에서 무슨 '매스컴 원론'같은 것을 가르칠 때 학생들을 앉혀놓고 하는 소리일지언정, 인간의 현실에 대고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 '간여'의 내용과 방향일 것이다. 이 문제는 과연 문제가 될 수 있고, 사실상 허다한 퇴행과 왜곡의 역사가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법제를 통해서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 문제는 언론사 내부에서 올바른 관행과 전통을 쌓아감으로써 스스로 준거를 세워나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 길이 없는 것이다. 법제보다는 사람이 언론을 만들어나간다. 언론은 어느 정도는 시스템이지만, 시스템의 틀 안에 언론의 모든 국면이 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편집권 독립을 위한 논의들은 언론의 자유를 확실히 법제적으로 보장하고, 그 결실로서 언론의 공정성, 공익성, 신뢰성을 제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시급히 개혁해야 할 부분은 이 방향과는 반대방향의 개혁이다. 언론의 자유를 신장하는 쪽으로의 개혁이 아니라, 언론의 자유를 빌미로 이미 권력화된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고 축소하고 견제하는 방향의 개혁이 언론개혁의 핵심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정치권력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언론은 스스로 권력화될 수 있는 함정을 그 기능 안에 지니고 있다. 한국의 언론들은 대부분 그 함정에 빠졌다. 언론이 권력화되어 가는 과정은 정치권력과의 공생관계로 전개되어왔다. 언론자유가 극도로 억압받고 있던 군사정권 시절에 언론사는 급속도로 권력화되어갔고 특권화되어 갔따. 그 권력은 '자유'를 내어준 대가로 정치권력으로부터 분양받은 반대급부였다. 지금, 자본금을 모두 잠식당한 수많은 언론사들은 천문학적 액수의 은행빚을 걸머지고 있다. 이 자금은 대부분이 회수 불능인 것으로 보인다. 회사를 팔아도 갚을 수가 없고, 회사는 팔아지지도 않는다. 은행이 미쳤다고 보증도 없이 담보도 없이 언론사에 그토록 막대한 자금을 빌려주었겠는가. 이것은 권력형 대출의 표본이다. 권력의 크기를 수치로 계량화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 언론사들의 그 막대한 은행빚의 총액은 한국 언론의 권력지수이며, 부패지수이며 비리의 지수인 것이다. 그러므로 언론의 개혁은 언론의 권력을 견제하는 방향 쪽으로 전개되어야 마땅하다. 내가 여러 지방을 돌아보니까, 사람들은 사이비 공갈 기자들의 행패에 넌더리를 치고 있다. 이것은 언론이 아니고 사회악이며 토착비리일 뿐이다. 정부는 '언론의 자유'라는 헛된 명분을 내세우며 이 사회악을 방치하고 있다.
한국의 언론시장은 현저한 독과점현상을 보이고 있다. 몇 개의 공룡신문들이 전국 신문시장의 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텔레비전 역시 방송 3사만의 시장일 뿐이다.
이 독과점 현상은 바람직한 민주주의의 모습은 아니지만, 독자들이 그 신문을 선택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로 보인다. 나는 이 독과점현상을 인위적인 작용이나 정치의 힘으로 '개선'하려는 의도에 반대한다. 그것은 지금의 독과점현상보다 더욱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 뻔하다. 단지 신문시장에 대해서 공정거래법 같은 자유경제의 기본원칙을 가혹하게 적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언론의 구조와 관련하여 가장 시급한 개혁의 과제는 텔레비전 방송 3사의 인사 및 경영에 관한 정부의 권력을 철폐하거나 제한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가 스스로 이 부분을 개선하지 않고, 신문시장의 균형에 개입한다면 명분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만을 자초하게 될 것이 뻔하다.
모든 언어는 다른 언어에 의하여 부정당할 수 있다는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 언론과 공론의 기본윤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리 설정된 사유의 틀이나 논리의 질서 속에 이 복잡하고 중층적인 세계를 강제로 편입시켜서 일사불란한 논리를 전개하는 언론행위는 별 가치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 언어는 결국 또 다른 언어에 의해 부정될 것이다. 이런 부정의 과정들을 명백하고도 억눌림 없이 드러내 보이는 것이 언론과 공론의 윤리일 것이다. 설득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언론의 윤리이다. 언어에는 말하기와 듣기가 있다. 언론은 말하기보다 듣기 훈련을 해야 한다. 언론 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듣기 훈련을 해야 한다. 말은 남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다. 언론은 담벼락에 대고 혼자서 주절거리는 소리가 아니다. 그런데 이 사회에는 듣는 자는 없고 말하는 자만 있다. 귀머거리들의 세상인 것이다. 언론과 공론의 윤리는 말하기에 있다기보다는, 이제는, 듣기에 있다고 본다. 이 윤리를 제도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법원은 언론의 윤리를 저버린 신문이나 방송에 대해 매우 불리한 판결을 내리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법원은 이제 언론의 편이 아니라 언론에 의해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시민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언론 종사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다행한 일이다. 또 언론중재위원회에 들어오는 중재신청 건수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시민들은 이제 언론의 횡포나 반윤리를 묵과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점점 더 확산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언론윤리에 관한 법제는 이러한 추세 속에서 저절로 자리잡혀갈 것으로 본다. 새로운 법제는 필요 없다.
이 싸움은 복잡해서 어지럽다. 정권 대 신문, 신문 대 신문, 신문 대 방송의 싸움은 전대미문의 백병전과도 같다. 나는 이 싸움의 본질이 조세정의도 언론자유도 아니라고 본다. 이 싸움의 본질은 권력투쟁이다. 권력화된 언론과, 그 권력에 대해 불안해하는 소수파 정권의 싸움일 뿐이다. 어느 쪽이 이기든 역사는 퇴행할 것이고, 이미 퇴행의 행보는 시작되었다.
언론사의 '탈세'를 조사하려면 현 정권 출범 초기에 했어야 옳았다. 시기를 놓쳤다. 정권 말기에 이 문제에 손을 댄 것은 정치적 의도를 의심받아 마땅하다. 조세포탈로 적발된 언론사들 중 정권에 우호적인 논조를 보였던 일부 언론사를 고발에서 제외한 것은 치명적인 잘못이다. 고발에서 제외된 언론사의 탈세액은 엄청났다. 이래가지고서야 무슨 언론개혁을 하겠는가.
방송이 연일 신문을 공격하는 사태에 대해서도,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방송사의 인사와 경영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정부는 책임을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
김훈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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