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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언론

아놀드 하우저와 함께하는 기자 이야기 - 한겨레 안수찬 기자

by K기자 2012. 9. 5.

아놀드 하우저와 함께하는 기자 이야기 - 한겨레 안수찬 기자

퍽퍽한 기자생활 가운데 요즘 저의 유일한 즐거움은 퇴근 이후(그게 밤 12시건 새벽이건 간에)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거기에 들어가 책을 읽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단한 독서광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기자들 공부 안한다'고들 하지만(사실 공부 안하는게 기자뿐이겠습니까. 교수, 판검사, 의사까지 `지식정보'로 먹고사는 많은 부류들이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죠) 정말이지 책 들여다 볼 여유가 없어 언제나 고민입니다. 

그래서 하루중 유일하게 `격조와 품위를 갖춘' 문자를 들여다보는 것은 이때뿐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현실의 복잡한 얼개들이 벌거벗은 채로 드러난 신문기사와 보도자료와 논평 따위를 읽는 일은 그저 육두문자로 가득한 스팸메일을 읽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아예 신문까지 욕조에 들고 가 읽고 있습니다. 

조금 `변태'적이라구요? 취재와 마감에 대한 모든 부담을 떨치고 나만의 공간에서 땀흘리며(?) 지식노동을 하는 일, 그 희열을 느끼시면 아마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입니다. 진작부터 읽고 싶었는데 창비사가 새롭게 4권짜리로 발행한 것을 이제야 손에 들었습니다. (이쯤에서 제 얄팍한 `독서편력'이 드러나는 건가요?) 4권 가운데 마지막 권의 중간쯤까지 넘겼습니다. 어렵더군요. 제 무식을 탓하며 어렴풋이 큰 줄기만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재미가 제법 쏠쏠합니다. 하우저가 19세기 근대 유럽의 여러 소설가의 문학세계를 평하는데 꼭 그게 오늘날 한국의 언론인들에 관해 시비거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발자끄, 루소, 스탕달, 디킨즈, 톨스토이, 토스토예프스키 등 유명한(그 이름만 알고 실제 그들의 소설은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작가들을 다 오늘에 되살려 앉혀놓고, `사실'과 그 복잡하고 풍부한 연관으로서의 `역사'를 그들이 어떻게 반영하고 표현하고 꿰뚫어 봤는지, 아울러 이를 통해 그들이 어떤 일신의 영화를 누렸고 어떤 계급의 이익을 대변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들이 느낀 개인적 고뇌와 번민은 무엇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여기에 요약할 능력은 제게 없습니다만, 흥미로운 건 `사실'에 대해 각 작가들이 취한 자세와 관점의 차이였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투영해낸 어느 작가는 그 계급적, 정서적 보수성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시대의 진보를 선명하게 구현해내고, 정치적·이념적으로 급진적이었던 또다른 작가는 그 반대편에 서게 되고…. 

뿐만입니까. 소설의 독자들이 대중과 지식인층으로 갈리면서 대중에 영합해 오히려 사실을 왜곡한 작가가 있고, 비록 소수 지식인을 겨냥한 것이지만 그 시대의 대중에게 한발 앞선 비젼을 보여준 경우도 있고…. 

널리 읽힌다는 것과 유익하다는 것, 유익하다는 것과 올바르다는 것, 이념적으로 옳다는 것과 사실을 제대로 들여다본다는 것, 사실을 반영한다는 것과 본질을 꿰뚫는 것 등이 서로 일치하기보다 불일치하고 화합하기보다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복잡하게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하고 있습니다. 

문학과 기사는 서로 전혀 다른 범주임에도 묘한 긴장관계와 접점을 갖고 있습니다. 하우저는 이 책에서 "기자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동시에 문학적"이라고 말합니다. 근대 부르주아지의 탄생과 함께 생겨난 신문, 그리고 기자는 당연히 그 시대적 배경과 떼어놓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특히 기자집단은 부르주아지의 언저리에서 맴돌던 많은 젊은 지식인들 가운데, 태생적으로 그다지 유복한 환경이 아님에도 정치를 하고 싶고 글을 쓰고 싶은, 다시 말해 대중을 장악해 자신의 세계를 펼치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든 결과였습니다.  

귀족층에 대한 `태생적 증오'와 함께 이제 막 태동했으나 벌써부터 썩은 냄새를 풍기는 상층 부르주아지를 경멸하며, 정서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에 더 가까우면서도 `우매한 대중'에 대한 불신과 계몽주의적 사명감을 가진 지식인들이었던 겁니다. 

`지식인'이라는 명칭 자체가 가진 몇가지 오해를 제외한다면, 오늘날이라고 해서 얼마나 다를까요? 정확한 통계는 아닙니다만 매스미디어가 가장 발달해 있다는 미국의 경우, 언론인 가운데 이른바 아이비리그 출신보다 각 주립대 출신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명문가의 자식들만 가는 아이비리그를 졸업하면 당연히 부와 명예가 안정적으로 보장된 `파워엘리트'에 곧장 편입되지만, 나름대로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여기는 수재들이 엄청난 학비를 감당하지 못해 일단 주립대에 진학한 뒤 끝내 그 공고한 파워엘리트 집단에 편입하지 못한 `설움'을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을 통해 풀어낸다는 것이죠. 

모두 사실은 아니겠지만 일정한 `진실'을 반영하는 해석이라고 봅니다. 사실 그런 기자집단의 `태생적 비판의식'때문에 미국의 저널리즘이 유지돼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에서 <유에스에이투데이>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즈> <월스트리트저널> 등 기본적으로 보수성향인 매체들이 판치는 미국 저널리즘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겠죠. 

(얼마전 서울대생들의 `가정환경' 등을 조사한 통계조사가 나왔는데, 저는 국내 중앙일간지 기자들의 연령별 `백그라운드'를 조사해보면 아주 재밌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과거 자료가 없어 비교하기는 힘들겠지만 말이죠. 대충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시죠?) 
  
이야기가 조금 빗나갔습니다. 여튼 하우저의 책을 읽으며 저는 다시 한번 `사실과 진실'의 오묘한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여기 A와 B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장과 비약의 위험을 무릅쓰고 잠시만 여러분과 함께 `사실과 진실의 게임'을 해볼까요? 

사실 1) A가 B를 죽였다. 
이 간단한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A를 살인자라고 판단합니다. 그 이상의 판단을 하지 않을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A는 `벌받아 마땅한 행위자'라고 인식됩니다. 

사실 2) B는 사채업자고 A는 노점상이다. 
뭔가 새로운 연관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사채업자에 대한 나쁜 인상과 함께 이 살인사건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사실 3) A는 B로부터 급전을 빌렸고 B는 돈을 갚으라며 A를 협박했다. 

아하, 악덕 고리대금업자의 독촉에 시달리던 가난한 노점상이 분노 끝에 살인을 저질렀군요. 이쯤에서 많은 사람들은 살인자 A에 대한 분노보다 악덕업자에 B에 대한 분노를 더 퍼붓기 시작할 겁니다. 

여기에 계속해서 또다른 사실을 덧붙여 보면 상황은 복잡하게 얽힙니다. 그런데 그 B가 사채시장을 주무르는 `큰 손'이었다. B가 만진 돈 가운데 과거 정권의 정치자금도 포함돼 있었다. 그 B가 최근 금융업 진출을 위해 각계에 로비를 했다…. 

만약 이런 `사실'이 더해지면 단순살인사건은 희대의 권력형 비리로 번지고, 사람들은 어느새 누가 누굴 죽였는지는 까맣게 잊고 서민의 고혈을 뽑아 만든 검은 돈을 정치자금으로 끌어쓴 권력자들에게 관심을 쏟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모든 기자들은 `사실'을 금과옥조로 여깁니다. 사실의 연관을 파고들면 들수록 보다 풍부한 `진실'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입사 이후 제 영원한 질문은 `어떤 사실에 천착할 것인가'입니다. 기자는 또는 어떤 언론매체는 세상사의 수많은 사실의 `모든' 이면을 밝히기 위해 `항상' 전력투구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실은 무시하고 어떤 사실은 단신보도합니다. 그 기준을 단순히 이념과 지향으로 일도양단하기에는 무리가 많습니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기사가치 판단'의 과정에서는 보다 복잡한 과정이 작용합니다. 

단순한 사실을 그 심층까지 파고들게 만드는 힘, 또는 어떤 사실을 다른 사실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게 하는 힘. 저는 역설적이게도 그 힘에 더 깊은 관심이 갑니다. 저는 여기서 `사실(FACT)'의 힘만큼이나 `상상력(FANTASY)'의 무게를 느낍니다. 

거리에서 얼어죽은 노숙자를 단신보도하느냐 그 이면에서 `1면 머릿기사에 오를 `진실'을 건져올리느냐의 순간에 시간과 열정과 발품을 들여 후자를 선택하게 하는 어떤 힘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갈림길에서 현장 취재기자, 이를 지휘하는 팀장, 최종교정을 보는 데스크, 이를 지면에 배치하는 편집자 등이 순간순간의 선택에서 그런 `선택의 힘'에 이끌려 판단을 내립니다. 

그리고 하우저가 문학가에 대해 지적하고자 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이런 선택의 `축적된 결과'는 언론인의 몫으로 돌아갑니다. 사실을 외면해 스스로의 정치적·이념적 지향을 `배반'하거나, 지극히 보수적인 지향에도 불구하고 사실에 대한 천착이 때로 사회의 진보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등 끝없는 사실과 진실의 복잡한 고리에 서있게 하는 거죠. 
  
그래서 신문을 읽는다는 것은 
1.사실의 이면에 연쇄적으로 펼쳐진 또다른 사실을 읽어내는 것이며 
2.동시에 그 사실을 특정한 틀에 담아 보도한 기자 혹은 매체의 의도를 읽는 것이며 
3.그 보도를 접한 다른 독자(대중)의 행동과 반응을 예측하는 것이며 
4.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나의 행동과 준거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또 미디어를 비평한다는 것은 
1.연쇄적인 사실의 고리에서 특정부분을 `의도적으로' 감춘 행위를 발굴해내고 
2.사실의 연쇄고리를 더 깊이 파고들지 못한 것을 비판하고 
3.그런 사실의 `조작과 가공' 속에서 기자(혹은 매체)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읽어내며 
4.마지막으로 그 의도가 가려버린 또 다른 사실의 고리와 그 총체로서의 `진실'을 인식하게 하는 일입니다. 

<한겨레>의 여론매체부는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일은 언론을 접하는 여러분 모두가 함께 해야할 일이기도 합니다. 기자로서 동시에 독자로서 저는 그 고민과 탐구를 평생토록 이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6개월이 채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 여론매체부에서 일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바쁜 사회부 생활 등을 마치고 나름대로 차분히 독자여러분과 `소통'하고 싶었는데, 숨돌림 틈도 없이 이번에는 정치부로 옮기게 됐습니다. 비록 몇 안되는 뉴스메일이었지만 이를 통해 한겨레 독자 여러분의 뜨거운 진심을 절감하게 됐습니다. 

정치부로 옮긴 다음에도 제 작은 `말과 길'을 이어갈 결심도 여기에서 비롯됐습니다. 자리를 옮겨 뉴스메일을 계속 보내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여러분이 걷는 길에 좋은 말벗이 될 유익한글, 많이 쓰겠습니다. 

정치부 안수찬 기자 <a href="mailto:ahn@hani.co.kr">ahn@hani.co.kr</a>